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
본능적 반응이란 어떤 계기로 자극된 감정에 빠져 평상심을 잃은 상태에서 반응 행동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 기분이 안 좋은 날 갑자기 쇼핑을 하면서 기분전환을 시도한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혹시 쇼핑으로 우울했던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잠깐이고, 양손 가득히 들고 온 쇼핑백을 내려놓는 순간 ‘돈을 너무 많이 쓴 거 아닐까?’, ‘지금 보니 이 옷은 나랑 전혀 안 어울리잖아’, ‘이건 얼마 전에 구입했던 신발이랑 비슷하고..’ 라는 생각이 들면서 후회한 적이 없었나? 쓸데없이 많은 돈을 썼다는 생각에 잠깐 좋았던 기분이 다시 나빠진 적은 없었나? 게다가 혹시 내가 산 물건을 다른 사람들은 얼마에 구입한지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했는데, 알고 보니 바가지를 쓴 걸 알면 우울했던 기분이 더 나빠진다. 그러나 자책할 필요는 없다. 이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어리석다고 경험하는 일들이 사실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임이 심리학 실험에서 거듭거듭 증명되었다.
미국 카네기멜론대학 Jennifer Lerner 교수는 ‘슬픈 감정과 재무적 판단 간의 상관관계’라는 연구에서 슬픔을 느낄 때 재무적 판단이 흐려져, 결국 돈을 낭비하게 됨을 보여주었다. 슬픈 상태의 참가자들은 즉각적으로 만족감을 얻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손실인 결정을 많이 내려 일반 참가자들보다 평균적으로 13~34% 더 낮은 수익을 냈다.
Jennifer Lerner 교수는 같은 대학의 Cynthia Crider 교수와 함께 슬픈 감정일 때 사람들이 물건을 좀 더 비싸게 구매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18~30세 33명의 실험 대상자의 절반에게는 주인공 소년의 스승이 죽는 내용의 슬픈 영화를 보여 주고, 다른 쪽에는 감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자연풍경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여 주었다. 영화를 본 뒤 실험 대상자들에게 물병을 사도록 시킨 결과, 슬픈 영화를 본 사람들은 자연풍경 영화를 본 사람들보다 30% 가량 더 많은 돈을 썼다. Jennifer Lerner 교수는 “슬픈 감정이 생기면 즉시 얻을 수 있는 행복감을 요구하는 ‘현실 중시 편향(present bias)’ 나타난다”며 “슬픔은 상황을 근시안적으로 보게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슬픔에 젖어 있는 사람은 금전적인 판단을 잘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소비자의 본능적 반응을 이용하는 사람들
누구나 슬프거나 우울하지도 않았고, 너무 기분이 좋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판매 장소에 우연히 들렸다가 원래 계획에 없었던 물건을 구입한 적이 있을 것이다. 바로 본능적 감정을 이용한 마케팅에 넘어간 것이다. 예를 들어, 불안한 마음이 들게 해서 물건을 구입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필자가 어르신들에게 금융사기 예방 교육을 위해 찾아간 서울의 한 복지관에서, 강의가 끝난 뒤 어르신 부부가 기다리고 계셨다. 단체로 관광을 한 후 전기장판 판매가 있었는데, 집에서 현재 사용하고 있는 전기장판은 전기가 외부로 흘러나와 건강에 해롭다는 설명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런지 눈으로 확인시켜주겠다고 하면서, 장판 표면에 전기가 흐르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실험 장비를 들고 나와 실험을 했다고 한다. 시중에서 판매 중인 전기장판 표면에서 전기가 번쩍하고 흘렸는데, 반대로 판매원들이 권유하는 전기장판 표면에서는 놀랍게도 전기가 흐르지 않았다고 한다. 할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그 광경을 보는 순간 이미 사용하는 전기장판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들이 판매하는 전기장판을 구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하셨다.
금융상품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다. 판매직원이 판매하고자 하는 금융상품의 좋은 측면은 크게 강조하고, 나쁜 측면은 대충 설명한다면, 금융소비자들은 판매직원이 권유하는 상품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게 되어 가입할 확률이 높아진다. TV에 나오는 보험 상품 광고의 경우 상품의 좋은 점은 천천히 설명하다가, 청약철회, 보험금 지급 제한사유와 같은 보험 판매자에게 불리한 고지사항은 광고가 끝나기 직전, 알아듣기도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설명한다. 금융회사에 직접 방문해 금융투자상품에 가입하는 경우, 판매직원이 금융소비자들이 듣고 싶어하는 수익성은 강조해서 설명하고, 투자위험은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도 금융소비자가 판매직원이 권유하는 상품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갖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특별한 감정을 유발하는 프레이밍(framing)
금융회사들의 위와 같은 기법은 넓게 보면, 프레이밍(framing) 효과를 이용한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어떻게 꾸며서(분장시켜서) 전달하느냐에 따라 반응이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을 분장효과 또는 프레이밍 효과라고 한다. 프린스턴대학교 카네만(Kahneman) 교수와 1997년 작고한 트버스키(Tversky) 박사가 실시한 실험을 살펴보면,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의사결정이 달라지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실험대상자에게 '600명이 사망할 수 있는 질병이 발생했을 때 어떠한 치료법을 사용하겠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두 가지 선택지를 제공하였다. 하나의 선택지는 다음과 같았다.
A안 : 200명을 살릴 수 있는 치료법
B안 : 600명 모두 사망할 확률이 2/3이며, 모두 살 확률이 1/3인 치료법
이 질문에는 72%가 A안을 선택했다. 이번에는 다른 실험대상자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고, 선택지를 수정해서 제시했다.
C안 : 400명이 죽는 치료법
D안 : 600명 모두 살릴 확률이 1/3, 모두 죽을 확률이 2/3인 치료법
이 질문에는 D안을 선택한 사람이 78%에 달했다. 실제로 A와 C안, B와 D안은 동일한 내용인데다가, 모든 안의 생존 기대가치가 200명이므로 네 가지 치료법이 동일하지만, 단지 표현만 다르게 제시했을 뿐인데 사람들의 선택은 다르게 나타났다. A는 긍정, C는 부정, 그리고 B와 D는 긍정과 부정이 섞인 표현인데, 긍정의 표현을 사용할 때가 사람들의 선택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물건을 구입하거나 금융상품에 가입할 당시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계약을 취소할 수 있는 쿨링오프 제도(숙려기간 두기)
순간적인 감정 때문에 물건을 구입하거나 금융상품에 가입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결정을 내리기 전 고려기간을 두면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고려기간을 설정하기란 쉽지 않은 듯하다. 따라서 환불제도나 쿨링오프 제도(system of cooling off, 청약철회)를 적극적으로 이용할 필요가 있다. 환불제도나 쿨링오프 제도는 현재 할부판매, 방문판매, 보험상품 등을 대상으로 시행되고 있다. 보험의 경우 지점이나 보험설계사 등을 통해 가입하면 15일, 전화 인터넷 등 통신수단으로 가입하면 30일간의 숙려 기간을 둬 가입자가 충분히 고민한 뒤 손해 없이 계약을 철회할 수 있다. 자본시장법 상 금융투자업자와 투자자문 계약을 체결한 투자자는 계약서류를 교부받은 날부터 7일 이내에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
감정이 앞선 소비로 자주 후회를 한다면..
본능적 반응을 억제하고 재무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 구속 장치를 둘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외국에 크리스마스 저축 클럽이란 저축 상품이 있다. 크리스마스 저축 클럽이란 11월에 계좌를 개설하면 이듬해부터 매주 일정 금액을 저축해야하는 상품으로 이자가 거의 없고, 1년 이내에 인출할 수도 없으며 1년 후 크리스마스 쯤 전액을 찾을 수 있는 상품을 말한다. 이 방법은 본능적 반응으로부터 자기 조절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한다. 미리 계획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소비하는 경향이 있다면, 신용카드를 없애고 체크카드를 이용해 보는 것도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이다.
본능적 반응을 이용해서 바람직한 행동을 유도하는 정책
본능적 반응을 이용해서 바람직한 행동을 유도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가나에서는 비누 이용률을 높이기 위해 비누의 장점을 소개하는 캠페인을 벌였으나 어머니들의 3%만이 용변 후 비누로 손을 씻었다고 한다. 연구자들은 가나 사람들이 자신들의 손이 더럽다고 느낄 때 비누를 사용하며(예를 들어, 요리나 여행 후), 혐오감을 느껴야 손을 씻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래서 용변을 보면 전염의 우려가 있고 혐오감을 가져오니까 비누로 손을 씻어야 함을 알리는 55초짜리 TV 광고를 제작해 방송했다. 그 결과 55초의 광고 중 비누로 손을 씻는 장면은 4초에 불과했지만, 비누 사용이 13%로 증가했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쿨링오프 제도나 크리스마스 저축 클럽과 같은 상품의 확대 정책도 바람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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