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이 있으면 행동이 바뀐다
맞는 말이다. 태어났을 때 우리는 아무 지식이 없을 것이다. 태어난 후 부모와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을 받아들여 사회가 요구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정치학’에서 인간은 사회적(정치적) 동물이라고 말했고, 미국의 작가 로버트 풀검(Robert Fulghum)의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는 책이 나올 수 있었나 보다. 어린 시절에 지식이 행동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그 시절에 배우는 지식의 내용이 대부분 단순한 행동지침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식이 있다고 언제나 행동이 바뀌지는 않는다
어린 시절이 지난 후에는 지식을 얻는 대로 곧 행동을 바꾸지는 않는 것 같다. 물론, 행동을 하기에 충분한 지식이 습득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다. 비행기를 조종하거나 대형 크루즈를 운항한다고 생각해 보자. 여기에 필요한 지식을 온전하게 갖추지 못하면 행동을 할 수 없는게 당연하다. 이런 경우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필요한 지식을 모두 습득하면 해결된다. 이런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지식이 행동에 영향을 크게 미치지 못하는 이유는 배운 지식의 대부분이 단순한 행동지침이라기보다는 지식 그 자체로서 더 의미가 있는 것들이기도 하지만, 삶이 복잡해지고 각자의 주관이 점차 확고해지면서 지식이 행동지침으로 가지는 기능이 약화되기 때문이다. 물론,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경우도 있겠지만, 지식이 충분하고 행동하려는 생각이 있더라도 행동을 가로막는 심리적인 요인들이 강력해서 행동에 옮기지 못한다. 재미있거나 습관 때문에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하는 경우도 있고, 귀찮거나 싫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을 미루는 경우가 다반사다.
으슥한 골목길에서 속칭 ‘삥’을 뜯는 학생들이나 학교 구석진 곳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는 학생들이 자기들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도 수많은 수험생들이 본래 생각과 달리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자기 자신을 원망한다, 배불뚝이 중년 아저씨들이라면 누구나 규칙적으로 운동해야 할 필요성을 알 것이다. 2011년 말 현재 우리나라 교정시설에 수감된 31,198명 중에서 범죄를 저지를 당시 자신의 잘못을 몰랐던 사람이 있을까? 비록 굶주린 조카를 위한 것이었지만, 장발장도 빵을 훔치면서 자신의 행동이 당당하고 거리낄 것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테고, 내 딸 서영이도 자기가 잘못하고 있음을 알았기에 3년 내내 전전긍긍했던 것이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란 말이 있다. 정신을 집중한다면야 이루지 못할 일이 없겠지만, 이런 말이 유포된다는 사실 자체가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실제로는 매우 어렵다는 반증이다. 아무래도, 교육을 통해서 사람들의 행동을 유도하겠다는 의도는 좋지만 그것만으로 많은 사람들의 행동을 실제로 바꾸는 효과를 거두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정책당국의 고민
이런 상황이 정책당국의 입장을 난처하게 한다. 과거에는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이 정책을 따르도록 강제할 수 있었지만 요즘 세상에서는 독재국가를 제외하면 그런 방법을 꿈도 꾸기 어렵다. 특히 금융 관련 정책에서 이런 상황이 보다 심각하다. 2011년 4월에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전 세계의 공적연금에 대한 특집기사를 낸 적이 있다. 전 세계적으로 고령화와 저 출산이 심화되어 연금을 받을 고령층의 수는 점점 더 많아지고 연금을 받는 기간도 길어지는 반면에 연금을 부담할 젊은 층은 줄어들어서 국가 재정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이 자기의 재무건전성을 위해서 보다 바람직한 금융행동을 해야 하는데 올바른 투자방법과 금융상품에 대한 지식을 교육시킨다고 사람들이 올바른 금융행동을 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고민거리다.
영국의 접근방법
이런 금융문제에 대해서 국가적으로 체계적인 접근을 시도했던 나라는 영국이다. 영국은 금융감독기구(FSA)를 중심으로 2000년대 이전부터 오랫동안 영국 국민들의 금융역량을 높이는 작업을 국가 정책으로 추진했다. 2006년에 영국 감사원 그리고 영국 하원이 FSA에게 그간의 추진효과에 대해서 검토하라고 요구했고, 이에 FSA는 런던정경대학(LSE)과 브리스톨 대학교 개인금융센터에 관련 용역을 발주했다. 양 기관은 2008년에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이들 보고서를 받은 FSA는 분명 당황했을 것이다.
브리스톨 대학교 개인금융센터가 맡은 용역은 FSA의 금융역량 강화 정책의 효과를 다른 나라의 유사한 정책과 비교하는 것이었는데, 보고서의 결론은 효과를 확인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평가를 염두에 두고 진행된 금융교육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러한 결론에 추가해서 동 센터는 금융교육은 목표를 정하고 평가할 수 있도록 설계해야 한다는 의견을 추가했다. 런던정경대학이 맡은 용역은 행동경제학의 관점에서 금융교육을 평가하는 것이었는데 보고서의 결론은 행동경제학에서 주장하는 인간의 여러 가지 비합리적인 편향(bias)이 금융행동에 영향을 미치는데 교육을 통해서 편향을 제거할 수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교육을 통해서 편향을 제거하려는 시도보다 주변 여건을 개선하는 방법을 주문했다.
영국의 금융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는 두 보고서의 결과를 심도 있게 보도하면서 우려를 표명했고, 그 후 FSA는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내용을 교육하는 것에서 각자의 구체적 사정을 상담하는 것으로 정책방향을 조정하였다. 2011년 4월에 ‘소비자금융교육기구’(Consumer Financial Education Body, CFEB)의 명칭을 ‘금융자문서비스’(Money Advice Service, MAS)로 변경한 점에서도 FSA의 정책 방향 선회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서브프라임 금융위기 이후 FSA의 설립 목표에 ‘금융시스템의 안정’ 목표가 신설된 반면에 ‘금융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 제고’ 목표가 삭제되었다. 그리고 FSA에게 그 업무를 담당할 기관을 설립하도록 법에 명시하였고 그에 따라 2010년 4월에 CFEB가 설립되었던 것이다.
(참고: 한국투자자보호재단에서는 2008년 런던정경대학(LSE)과 Bristol 대학교 Adele Atkinson 박사가 FSA에 제출한 연구 보고서를 전문 번역해 “(투자자보호 시리즈 2) 금융역량, 행동경제학에 물어보다”와 “(투자자보호 시리즈 3) 금융교육, 효과 있었나? -사후평가에서 증거 찾기-”로 발간했습니다.)
새로운 방법론: 넛지 그리고 MINDSPACE
최근에는 교육을 통해 사람들에게 지식을 주입함으로써 행동을 유도한다는 실현 가능성이 극히 낮은 방법 대신에 사람들의 본능을 이용해서 행동을 유도하려는 방법들이 개발되어 인기를 얻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넛지’(Nudge)다. ‘넛지’란 2009년에 국내에 소개된 이후 지금도 꽤 인기가 있는 책의 제목인데, ‘팔꿈치로 슬쩍 찌르다’, ‘주의를 환기시키다’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다. 넛지에는 사람들의 본능을 이용해서 바람직한 행동을 유도한 사례가 여럿 소개되어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암스테르담에 있는 스키폴(Schiphol) 공항의 사례다. 우리나라 남자 화장실에 가면 소변기 바깥으로 새는 소변을 줄이기 위해서 다양한 표어가 붙어 있는데 네덜란드도 별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다가 소변기에 파리 모양 스티커를 붙여놓자 소변 흘리기를 80%나 줄일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각자 생각하면 알 수 있다.
영국은 넛지를 구체화한 MINDSPACE라는 방법론을 개발했다. MINDSPACE란 사람들의 본능을 자극해서 행동으로 유도할 수 있는 요인들을 전달자(Messenger), 유인(Incentives), 규범(Norms), 기본대안(Defaults), 돌출성(Salience), 사전 암시(Priming), 본능적 반응(Affect), 공개적 약속(Commitments), 자아상(Ego)으로 구분하고 각 요인의 머리글자를 모아서 만든 합성어이다. 원래는 일반 정책을 위한 도구로 개발되었는데, MAS가 금융 분야에 적용하는 방법론을 2010년 7월에 발표하였다. 어떤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우리의 행동이 달라지고, 어떤 일을 하거나 하지 않으면 즉각적인 이익을 얻게 될 때도 우리의 행동이 달라진다. 사회적으로 지켜야할 규범이 있는 경우 사람들은 그에 따르게 된다. 남자 고등학생 사이에 특정 회사의 패딩 옷이 얼마나 유행했던 가를 생각해 보라. 복잡하고 골치 아픈 결정을 해야 할 때는 사람들이 의사결정을 미루는 경향이 있으니까 미리 기본대안을 정해두면 도움이 된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자꾸 알려주면 행동이 바뀌게 되고, 사람들에게 각자의 자아상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꿔주면 바람직한 행동을 유도할 수 있다. 지하철에서 이상형의 이성을 만나면 우리의 행동거지가 달라지며, 자기 주변의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나면 그 약속을 억지로라도 지키려 노력한다. 또한, 사람들은 타인들에게 자기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기 때문에 걸맞는 행동을 하려 한다.
새로운 방법론이라고 완벽한 것은 아니다
넛지의 방법을 금융정책에 적용한 결과 실제 효과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401(k)(퇴직연금)에 근로자들이 가입을 신청해야 하는 방식에서 자동으로 가입되는 것으로 하고 원하지 않는 경우 탈퇴 의사표시를 행동으로 보여야 하도록 했더니 가입자가 크게 늘었다. 또한, 급여가 인상될 때마다 저축금액을 자동적으로 증액하도록 했더니 납입금액이 크게 늘었다. 사람들이 알고 있어도 결정을 미루는 편향을 이용한 방법들이다. 본능을 활용하는 방법이 이처럼 상당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지만, 이 과정이 본능적으로 금세 진행되어 행동에 대한 가치판단이 생략된다. 따라서 투자자들이 오히려 자기에게 불리한 행동을 하도록 유도될 수 있고,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결정될 수도 있으므로 사전에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제부터 행동을 유도하는 아홉 개의 비밀 상자를 열어 보자.
(책자소개) MINDSPACE의 내용이 수록된 “(투자자보호 시리즈 5) 금융행동 바꾸기” 등 투자자보호 시리즈의 내용은 국회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등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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