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문화정치,
개혁과 문예부흥의 두 마리 토끼 잡았다
정조는 관료제 개혁, 신해통공* 등 정치・경제 분야에서 개혁을 주도한 개혁 군주의 이미지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음악・미술・문학 등 문화예술 분야에 조예가 깊었던 군주이기도 했다. 즉위 이후 펼친 문화경영정책은 조선 후기 문예 부흥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달의 왕의 경영학에서는 정조가 문화경영을 중시한 이유와 그 성과에 대해 알아본다. 이를 통해 문화경영이 현대에 시사하는 바를 살펴보고, 현대의 문화예술경영과 기업의 메세나 활동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출처 : http://blog.naver.com/jcs203/220191584593
* 신해통공 – 정조 15년(1791)에 시행된 조선후기의 상업정책. 한양의 육의전(六矣廛)을 제외한 시전(市廛)의 전매권을 폐지하여 사상(私商)이나 난전(亂廛)의 자유로운 상행위를 허용한 정책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을 극복하고 개혁 정치를 펼친 조선 후기 ‘성군’으로 평가받는다. 사후 제기된 독살설이 더해져 조선의 역대 국왕 중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로 꼽히기도 한다. ‘정조의 치세가 조금 더 길어져 실학이 활성화되고 정치개혁이 이뤄졌다면….’하는 아쉬움은 그를 ‘개혁 군주’로 그리고 있는 여러 드라마·영화들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정치적으로 불안했던 정조, 즉위 직후 문화 정치 표방
정조는 1759년 8살의 나이로 세손에 책봉되었다. 1775년에는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고, 1776년 3월 영조가 세상을 뜨자 22대 왕으로 즉위했다. 정조의 즉위과정에 있어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 외에 큰 굴곡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사실 정조는 왕으로 즉위하기까지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노론 벽파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은 것에 더해 정조의 생명까지도 위협했다. 세손 시절인 1775년 대리청정을 하게 됐을 때 노론 벽파(홍계희, 홍인한, 김상로, 정후겸, 김귀중 등)는 대리청정은 물론 정조의 즉위를 완강하게 반대했다. 홍인한은 영조에게 “동궁은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극렬하게 반대하기도 했다. 정조는 홍국영 등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이어나갔다. 이 같은 분위기를 알고 있던 영조도 순감군(巡監軍)*의 수점권(受點權)*을 세손에게 주어 만일을 대비하기도 했다.
이처럼 정조는 당쟁으로 정국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즉위했다. 때문에 즉위 직후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만드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즉위를 방해했던 홍인한, 정후겸, 홍상간, 윤양로 등을 제거하고, 규장각을 설치해 친위세력 양성에 힘을 쏟았다. 세조·숙종도 설치한 적이 있는 규장각은 선대 왕의 유품을 보관하는 왕실박물관이자 왕실도서관의 기능을 해왔다.
그러나 정조는 다른 의미로 규장각을 ‘활용’했다. 정조는 규장각 설치로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자신을 보좌하는 신진 세력 양성의 창구로 활용했다. 정조 3년(1779년)에는 이덕무, 유득공 등 서얼 신분을 검서(檢書)*로 임명했고, 1781년에는 규장각을 내각·외각으로 확대했다. 이외에도 남인 채제공을 규장각 제학으로 임명하는 등 친위세력 육성에 힘을 쏟았다(채제공은 이후 1788년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 순감군(巡監軍): 순청감군(巡廳監軍)을 줄여 이르던 말. 순청은 도성의 도적과 화재를 방지하고 성문 순번을 맡았던 관청. 감군은 도성 내외의 야간순찰을 감독하는 군직(軍職).
* 수점권(受點權): 문관, 무관에 대한 임명권.
* 검서(檢書): 규장각 소속으로 서책의 교정 따위를 맡아본 종 7품 벼슬. 정조는 서얼 출신 중 재주있는 인사들을 검서로 모아 그들의 학식을 정사에 이용.
정조가 펼친 문예부흥정책
정조의 문화정치 표방은 친위조직 양성에만 목적이 있던 것은 아니다. 정조는 문화예술에 관심이 높았고, 조예 또한 깊었던 인물이다. 그는 즉위 전부터 계속돼 온 붕당정치를 타파하고 그로 인해 피폐해진 민생을 되살리기 위해서 문예부흥을 통한 왕권강화가 필요하다고 봤다. 기본적으로 그는 문화예술을 통해 백성에 대한 교화가 가능하다는 예술효용론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당시 문화예술에 대한 적절한 통제와 발전을 통해 국가질서를 바로 잡고자 했다(원향미, 2006. 조선 후기 정조의 문화정책 연구).
왕은 홍재전서(弘齋全書)* 등 방대한 양의 문집과 서적을 저술했다. 또한 ‘파초도’, ‘국화도’, ‘묵매도’, ‘사군자도’ 등의 그림을 직접 그리기도 했다. 실록에는 정조의 음악에 대한 관심도 잘 기록되어 있다. 특히 악학(樂學) 정비나 악서(樂書) 편찬 등을 지시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정조 2년(1778년) 11월 29일, 왕은 악공(樂工)과 악생(樂生)에게 가금, 가야금, 비파, 아쟁, 해금 등을 탈것과 당적, 통소, 태평소 등을 불도록 지시한다. 음악을 들으며 악공과 악생의 수를 물은 왕은 이렇게 이야기 했다. “음악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라 대제(大祭)*가 다가와 한 번 직접 시험해 보고자 하였다. 악기의 척도가 법제에 어긋나고 절주가 맞지 않는 것은 논하지 않더라도 악공, 악생들이 모두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어 한심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이에 정조는 악공·악생들의 연주 실력을 제고하고 악기를 점검하도록 지시한다. 정조의 문화예술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문예부흥정책으로 직결된다. 특히, 미술에 대한 왕의 관심은 궁중화원제도 도입이라는 파격으로 현실화됐다.
1783년 정조는 규장각 안에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 직제를 만들었다. 자비대령화원은 당대 최정상의 화원화가 중궁중화원으로 선발된 이들이다. 이들은 국왕과 각신들이 직접 실시했던 ‘녹취재(祿取才)’ 등의 시험을 치르며 특별 관리를 받았다. 이전까지는 국왕이 화원을 부리기 위해서는 승정원이나 도화서를 관장하는 예조 관료들을 통해야만 했다. 그러나 정조는 자비대령화원이라는 직제를 설치함으로써 궁중화원 제도를 국왕 자신이 직접 관장했다. 기존에는 궁중에서조차도 대우를 받지 못했던 궁중 내 문화예술인력들은 국왕 직속으로 관리를 받게 되었다.
이 제도는 철저히 능력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를 통해 조선의 회화발전 또한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었다. 김홍도, 신윤복, 김득신 등 조선 후기 3대 풍속화가도 이 시기 배출되었다. 자비대령화원 제도는 문화예술전문인을 양성하는 하나의 정예코스로 자리 잡았다(원향미, 2006. 조선 후기 정조의 문화정책 연구).
자비대령화원에는 김홍도, 신윤복, 김득신 외 이인문, 박유성, 김응환, 신한평, 김석신 등이 있었다. 1783년부터 1881년까지 ‘내각일력’에 기록된 자비대령화원은
총 104명으로 김하종, 장한종, 이한철, 유숙 등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원화가들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특히 김홍도의 경우 정조의 절대적인 후원이 없었다면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김홍도는 당시 화원으로서는 최대의 영광인 어진(御眞)도사(圖寫) 작업에 세 차례나 참여했다. 화원 출신으로는 이례적으로 안기(安奇) 찰방(察訪)*과 연풍(延豊) 현감(縣監)*을 지내기도 했다.
정조는 자신의 저서인 ‘홍재전서’에서 “김홍도는 그림에 솜씨 있는 자로서 그 이름을 안지가 오래다. 삼십여년 전 나의 초상을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홍도를 시켜 주관케 하였다. 화원은 관례로 새해 초에 첩화(帖畵)를 그려 바치는 규정이 있다. 금년에 홍도는 물헌(勿軒) 웅화(熊禾)가 주(註)를 붙인 주자의 시로 여덟 폭 병풍을 그렸는데, 주자가 남긴 뜻을 깊이 얻었다. 이미 김홍도가 하폭에 원운시(原韻詩)를 썼으므로, 나는 그에 더하여 화운시(話韻詩)를 썼는데, 눈여겨보고 감계(鑑戒)의 자료로 삼을 뿐이다.”고 김홍도와의 ‘인연’을 설명하기도 했다.
정조의 절대적인 후원과 지지를 받았던 김홍도는 작품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가 그린 그림은 동시대는 물론 후대 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학계 일각에서는 김홍도의 그림이 정조에게 제출한 ‘민생보고서’였다는 견해가 있다. 국왕의 총애를 받는 국왕의 직속 화가가 어진 대신 백성의 생활상을 그대로 반영한 그림을 다수 남겼다는 이유에서다. 그의 그림에는 다양한 백성의 모습이 등장한다. 고름이 없는 웃옷을 입은 채로 타작하는 농민, 가슴이 드러나는 저고리를 입고 빨래터에서 머리를 만지는 아낙, 새참을 먹는 농부와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아낙의 그림 등 김홍도의 그림에는 백성의 생활상이 여과 없이 묘사돼 있다. 김홍도의 그림이 ‘민생보고서’라는 시각에서 봤을 때, 이러한 사실적 묘사는 양란 등으로 피폐해진 백성의 민생을 돌보고자 했던 왕의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궁궐 밖으로의 출입이 쉽지 않았던 정조는 김홍도를 통해 백성들의 생활에 대해 보다 상세히 알고자 했다. 김홍도의 그림은 개혁정치를 펼쳤던 정조에게 있어 정치의 방향 설정을 위한 잣대이자 성과를 가늠하는 자료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음악 또한 정조에게 있어서는 국가를 바로잡기 위한 필수 요소였다. 정조대는 시장경제의 발달로 부유해진 중인계층이 음악의 적극적인 수요자로 등장하던 시기였다. 민간음악 또한 자연히 활발해졌다. 새로운 수요는 새로운 음악양식을 등장시켰고, 음악의 가락은 복잡해지고 빨라졌다. 이 시기에는 변주곡도 다수 등장한다.
그러나 정조는 음악에 있어 보수적인 입장이었다. 궁중음악이 민간음악을 따라가며 변질되는 것을 경계했다. 궁중음악은 종묘제례악, 문묘제례악 등 유교제례에 사용되는 음악인 만큼 민간음악의 영향을 받아 변질된다면 유교의 기초가 흔들릴 수 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정조는 음악이론 정비를 위해 1780년 악서인 시악화성(詩樂和聲)을, 1781년 전례(典禮) 악장집인 국조시악(國朝詩樂)을 펴냈다. 규장각 학사들에게는 특종(特鍾)·편종(編鍾)을 익히도록 명하기도 했다. 또 음률체계를 바로잡기 위해 장악원(掌樂院)의 악공, 악생들의 연습을 명하고 연습에 직접 참관하기도 했다.
궁극적으로 정조의 문예부흥정책에는 그림과 음악을 통해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고, 왕권을 강화해 개혁 정치를 뒷받침할 수 있는 동력원을 만들기 위한 계산이 깔려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정조의 문예부흥정책은 조선 후기 시장경제 발달에 따른 문화예술의 수요 증가와 맞물려 회화, 문학, 음악의 발달로 이어졌다. 이것이 정조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왕의 문예부흥정책이 조선의 문화 발달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 홍재전서(弘齋全書): 정조의 어제(御製)를 모아 엮은 문집. 정조 재위 당시부터 수차례의 편찬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184권 100책으로 편차가 확정되었고, 1814년에는 활자를 이용하여 간행.
*대제(大祭): 조선 시대에 종묘ㆍ사직ㆍ영녕전에서 지내던 큰 제사.
* 찰방(察訪): 조선 시대에 각 도의 역참 일을 맡아보던 종육품 외직. 문관의 벼슬.
*현감(縣監): 조선 시대 작은 현(縣)의 수령.
○ 전세난에 귀하신 몸 "신축빌라", 똑똑하게 고르는 법! ▷
○ '계좌이동서비스' 제대로 알고, 제대로 이용하자! ▷
카카오가 제공하는 증권정보는 단순히 정보의 제공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사이트에서 제공되는 정보는 오류 및 지연이 발생될 수 있습니다.
제공된 정보이용에 따르는 책임은 이용자 본인에게 있으며, 카카오는 이용자의 투자결과에 따른 법적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Copyright (c) Kakao Corp. All
rights reserved.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사 또는 글쓴이에 있으며 카카오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