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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20년, 끝없는 몰락의 연속[7]
추천 11 | 조회 8392 | 번호 5367 | 2015.11.28 20:04 펀드슈퍼마켓 (simamoto1***)





영원할 것 같던 일본의 고도성장은 1970년대 석유파동이 일어나면서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원자재 값 상승으로 경제가 가라앉을 조짐이 보이자 일본 정부는 고정환율제와 금리 인하를 단행했고, 이는 거품을 더욱 부추기는 부작용을 낳았다. 

이후 플라자 합의가 체결되면서 엔화 가치가 하루아침에 2배로 뛰었고, 경제대국 일본은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1990년 초 주식시장 붕괴를 시작으로 일본의 버블은 꺼지기 시작했고, 부동산 신화도 추락하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20년’이 시작된 것이다.


파국의 시작, ‘플라자 합의’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거품경제가 붕괴된 후인 1991년 3월부터 아베노믹스 이전까지 약 20년 이상 경제가 침체한 기간을 말한다. 흔히 ‘헤이세이(1989년부터 사용되고 있는 일본의 연호) 대불황’이라고 불리는 초기 10년간의 ‘잃어버린 10년’과 2000년대 이후의 ‘이자나미(いざなみ)경기’ 시기를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일본의 고도성장은 1970년대 석유파동이 일어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1, 2차 석유파동으로 원자재 값이 폭등하자 일본은 지속적인 성장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1달러를 250엔으로 묶어두는 ‘고정환율제’를 도입했다. 엔저를 유도해 수출시장에서 가격경쟁력을 확보하자는 취지였다. 

고정환율제는 단기적으로 효과를 발휘했다. 미국산 상품보다 일본산 상품이 저렴해지면서 일본은 당시 세계최대 시장이던 미국시장을 장악해 나갔다. 

하지만 일본의 고정환율제로 경제에 큰 타격을 입은 미국이 당하고만 있을 리는 없었다. 1985년 9월 22일 미국은 뉴욕에 위치한 플라자 호텔에 프랑스, 독일, 일본, 영국 등 G5의 재무장관들을 불러 모은 뒤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으로 인해 만들어진 달러화 강세를 시정하기로 결의하는 ‘플라자 합의’를 체결했다. 

‘플라자 합의’의 타깃은 누가 봐도 일본이었다. 억지춘향격인 합의였지만 이로 인해 일본의 엔저는 하루아침에 엔고로 바뀌고 만다. 1달러 당 250엔이던 엔/달러 환율은 플라자 합의 이후 1달러 당 149엔으로 폭락했다. 엔화의 가치가 순식간에 2배로 뛰어오른 것이다. 

일본 경제는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기업들의 수출이 큰 타격을 입으면서 20여 년간 10%에 가까웠던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심상찮은 조짐에 일본 정부는 기준금리를 5%에서 2.5%로 낮추며 대응에 나섰다. 

그런데 일본정부의 이러한 조치는 사상 초유의 버블을 부르는 단초가 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수년간 일본경제는 주가가 치솟고 부동산값이 폭등하는 등 파국을 향한 마지막 질주를 이어갔다.





장고 끝에 악수 또 악수, 정부의 실패

예고됐던 불황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1990년대 초 일본은행이 경기과열을 막기 위해 금리를 올리면서 하루아침에 거품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1989년 최고치 3만9000포인트에 육박하던 닛케이지수는 1990년 2만4000포인트까지 급락했고 부동산 가격도 폭락했다. 자산 가격이 주저앉고 금리마저 오르자 무차별적인 대출을 받았던 투자자들은 돈을 갚을 수 없게 됐고, 이는 금융사들의 부실로 연결됐다. 

일본 정부는 무기력했다. 경기대책에 전력을 쏟아부어야할 시기였지만, 당시 일본은 자민당의 분열과 3당 연립정권이 들어서는 등 정국혼란이 계속되는 상황이었다. 

정쟁에 빠져있던 일본 정부는 악수에 악수를 거듭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경기를 살리겠다며 낮추기 시작한 금리는 결국 마이너스 금리까지 도달하는 상황을 맞았다. 은행에 돈을 맡기면 이자를 받는 것이 아니라 보관료를 내야하는 아이러니까지 연출됐다. 

그나마 효과를 본 것은 토목 공사였지만 이마저도 정부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일본 정부는 막대한 돈을 사회간접자본(SOC) 건설에 쏟아 부었다. 이렇게 해서 1990년 대 중반 경기가 완만하게 살아나자 일본 정부는 갑자기 건설정책을 중단해 버렸다. 

난데없이 소비세를 올린 것 역시 악재로 작용했다. 1997년 하시모토 정권은 한신??아와지(阪神淡路) 대지진 피해 복구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국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소비세 인상을 단행했다. 이는 소비의 급격한 감소를 초래했고, 같은 시기 발생한 아시아외환위기 등과 겹치면서 금융기관의 잇따른 파산과 경제상황 악화를 불러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90년~2000년까지 일본에서는 은행 17개, 신용금고 14개, 신용협동조합 93개가 문을 닫았다.


반복되는 더블 딥

이후 일본 경제는 살아날 조짐을 보이다 다시 침체하는 ‘더블 딥’을 반복했다. 

2000년대 초 정보통신(IT) 열풍으로 잠시 호황을 맞았지만 이마저 거품이 붕괴되며 경기가 급락했다. 고이즈미 정권 출범 후 구조 개혁이 단행되면서 경기가 바닥을 치고 완만한 회복세를 지속하는 듯 했지만 제로 금리 정책이 계속되면서 은행의 돈이 기업에 투자되지 않는 악순환을 끊지 못했다.

2008년에는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찾아오면서 일본 역시 경기가 급격히 악화됐고, GDP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또한 리먼쇼크와 그리스위기로 달러와 유로의 가치가 급락해 엔화가치가 높아져 수출경쟁력마저 상실했다. 

여전히 일본 정부와 은행들의 대응은 느리기만 했고, 마이너스 성장의 늪에서 빠져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2010년에는 가구소득이 1987년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중산층이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현상이 급속히 진행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11년에는 동일본대지진,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폭발 등 대형 재난까지 경제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면서 일본경제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잃어버린 20년’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누가 사용하기 시작했는지 불분명하다. 심지어 외래어인지조차 알지 못한다고 한다. 어쩌면 일본인들에게는 출처를 알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단어일지도 모른다.





글. 정일환 기자(imthetop@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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