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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생도 연봉 1억’ 화려했던 경제대국[3]
추천 16 | 조회 9545 | 번호 5354 | 2015.11.24 21:09 펀드슈퍼마켓 (simamoto1***)





일본은 탄탄한 제조업을 바탕으로 한 때 미국을 곧 추월할 나라로 추앙받던 시절이 있었다. 1970~1980년대 일본은 지금의 중국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높은 경제성장률을 구가하며 올림픽과 만국박람회를 개최하는 등 아시아 유일의 선진국으로 위세를 떨쳤다. 

1988년 세계 50위 그룹 가운데 일본 기업이 23개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은 당시 일본 경제의 위상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일본경제 부흥의 원동력, 전쟁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온 나라가 황폐화됐던 일본을 일으킨 것은 이웃나라의 전쟁이었다. 일본은 우선 1950년대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첫 번째 경제성장의 기회를 잡게 된다.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 덕분에 일본은 한국전쟁 기간 동안 미군의 군수공장 역할을 수행하며 제조업 발달의 기반을 다졌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1950년부터 1952년까지 2년간 일본에는 무려 2500개소의 각종 미군 시설이 들어섰다. 육해공군을 위한 훈련장, 병원, 휴양소, 항만시설, 무기고, 공병시설 등이 만들어지면서 건설 붐이 일었다. 

미국의 기술과 자금도 일본에 공급됐다. 당시 주일 미국 대사였던 로버트 머피는 “일본열도는 놀라운 속도를 내며 거대한 보급창고로 변해갔다. 이게 없었더라면 한국전쟁은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회고했을 정도다. 

일본을 대표하는 토요타 자동차를 키운 것도 알고 보면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전쟁 이전까지 월 300여 대의 트럭을 생산하는 것이 고작이던 토요타는 1950년 6월 이후 매달 1500대 이상의 차량을 쏟아냈다. 판매량이 5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뒤이어 터진 베트남전쟁은 일본인들에게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다시 한 번 전쟁특수가 일본 열도를 뒤덮었고, 달러가 쏟아져 들어왔다. 

다른 나라의 전쟁을 등에 업고 일어선 일본은 2차 세계대전 패전 23년만인 1968년 국민총생산(GNP)이 미국에 이어 2위에 오를 정도로 부유한 나라가 됐다.





모든 가정에 ‘삼종신기(텔레비전, 세탁기, 냉장고)’ 보급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기간, 일본은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고속성장을 이뤄냈다. 1955년~1973년 일본의 실질 경제성장률은 무려 9.1%로, 미국의 3%, 유럽의 5%보다 약 2배~3배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서방국가들로부터 ‘동양의 기적’이라는 칭송을 받던 당시의 일본은 두둑해진 지갑을 바탕으로 돈쓰는 맛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에는 텔레비전, 세탁기, 냉장고 등 3종류의 가전제품이 ‘삼종신기’라 불리며 모든 가정에 급속히 보급되어 갔다. 소니와 파나소닉 등 가전 재벌그룹이 등장한 것도 이때였다. 

또 ‘큰 것이 좋은 것’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며 과소비 풍조가 만연했고, ‘은행이여 안녕, 증권이여 어서와’라는 말로 상징되는 증권투자 시대가 열렸다. 

당시는 지금도 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것 3가지로 꼽는 교진(巨人), 다이호(大鵬), 다마고야키(卵燒き)를 모든 사람이 누리는 시대였다. 

교진은 일본 프로야구팀(요미우리 자이언츠), 다이호는 역대 가장 유명한 일본 스모선수, 다마고야키는 도시락 반찬인 달걀프라이를 말한다. 모든 일본인이 야구와 스모를 즐기고, 달걀프라이를 도시락 반찬으로 싸갈 수 있을 만큼 풍족하고 여유로웠다는 얘기다.


자고 나면 2배, 거품경제의 시대 

경제적 풍요가 극에 달한 뒤 나타난 것은 거품이었다. 정부가 금리를 내리자 일본 기업들은 앞다투어 대출을 받아 자산투자에 나섰다. 사업은 뒷전이었고 주식과 부동산 투자를 통한 수익확보에 열을 올렸다. 

이 시기 민영화에 나섰던 NTT(일본전신전화회사)의 주가변화는 당시의 일본경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상장 당시 NTT의 주가는 주당 무려 120만엔이었다. 상장가만으로 상상을 초월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상장 직후 NTT의 주가는 주당 400만엔까지 치솟았다. 금융시장이 투기성 자본으로 가득 차기 시작한 것이다. 

‘부동산 불패’ 신화가 등장한 것도 이때였다. 

일본의 부동산 가격은 1960년대~1970년대 50배나 오르며 이미 거품이 잔뜩 낀 상태였다. 하지만 1980년대 투기성 자본이 대거 부동산으로 몰리기 시작하면서 거품은 신화로 변했다. ‘땅값은 절대 하락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생겨난 것이다.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지만 일본은 손을 놓고 있었다.

정부는 부동산 담보 대출 비율을 200%로 유지했고 은행들은 대출금리 인하 경쟁에 나섰다. 갈수록 버블이 커지면서 일본에는 돈이 넘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대기업의 초봉은 2000만엔에 육박했고, 아르바이트만 해도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게 되자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리는 ‘프리타’ 개념도 등장했다. 

모두가 흥청망청 써댔고, 해외부동산과 미술품, 골동품들을 일본인들이 쓸어 담으면서 이들의 가격마저 폭등했다.



글. 정일환 기자(imthetop@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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