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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임금에게 배우는 기업과 개인의 사회적 책임 (1편)[3]
추천 20 | 조회 5683 | 번호 5278 | 2015.10.28 09:00 지니아이 (fnge***)

천민 출신의 어머니, 경종 독살 의혹 그리고 아들의 죽음까지 지독한 콤플렉스와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영조.
그러나 자신의 개인사를 휘감은 고통에 휘둘리지 않고, 이를 현명하게 극복해 민생을 안정시킨 임금이었다.
조선후기 중흥기를 가져온 그가 최고의 통치자로 추앙 받았던 것은 근검절약과 백성을 위한 애민 정신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달의 왕의 경영학에서는 경기 침체가 계속되고 있는 현 시점에 영조의 리더십과 가치관에 대해 주목해 본다. 이를 통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개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중요함을 재조명 해본다.

역대 가장 검소한 생활을 했던 왕

영조(1694~1776년, 재위 기간 1724년 8월~1776년 3월)는 애당초 왕이 될 인물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무수리 출신이라는 출생의 한계도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도 험난한 상항에 처해 있었다.

아버지인 숙종은 세 명의 왕비를 맞았지만 아들을 얻지 못했다. 숙종에게 아들을 안겨준 이는 나인 출신의 희빈 장씨와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씨였다. 희빈 장씨가 낳은 왕자 균은 3세에 세자에 책봉된다. 그러나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게 되면서 왕자 균 또한 위태로워졌다.

이후 숙종은 당시 좌의정이자 노론의 영수였던 이이명에게 숙빈 최씨의 아들인 왕자 금(연잉군, 훗날의 영조)을 후사로 결정해달라고 요청한다. 이로써 연잉군의 세자 대리청정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왕자 균을 지지했던 소론측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소론의 반발과 연잉군 지지축인 노론 간 당쟁으로 조정은 혼란에 빠졌다. 노론·소론 간 정쟁, 신축옥사·임인옥사*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경종이 승하한 뒤에야 연잉군은 가까스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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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왕위에 오르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다짐했던 것 같다.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힘겨웠던 과정과 천민 어머니를 둔 점 등이 본인의 생활은 물론, 지배계층인 양반들에 대한 관리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신하와 백성이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임금 스스로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가난한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12첩 반상의 반찬수를 줄이고, 5식의 식사도 3식으로 줄였다. 대궐의 방문이 뚫리면 손수 종이 조각으로 구멍을 메웠고, 헤진 버선은 기워서 신었다.

* 신축옥사: 1721년(경종 2년) 당시 실권을 장악한 노론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연잉군(숙빈 최씨의 아들, 후일 영조)을 왕세제에 책봉함. 이어서 대리청정까지 무리하게 추진하다 서인 세력을 주도하던 대신들이 유배형을 받게 되었던 사건.
* 임인옥사: 1722년(경종 3년) 노론이 경종을 암살하거나 폐위시키기 위해 일으킨 역모사건으로 일어난 옥사.
*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 초기 로마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보여 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에서 비롯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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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방석’도 유명한 사례이다. 임금이 장판방에 앉는 것이 송구스러웠던 호조판서는 방석을 만들어 영조에게 올렸다. 이 방석은 다른 임금들의 호화스러운 비단 방석과 달리 왕의 검소함을 생각해 무명천에 푸른 물을 들여 솜을 넣어 만들었다. 그러나 영조는 사흘 가량 방석을 사용한 후 호조판서에게 되돌려주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요를 깔고 앉아보니 몸은 편하지만, 몸이 편하면 자연 몸이 게으르게 되기 때문에 쓰지 않으려 한다. 호조의 호의로 검소한 것은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 덕 뿐만 아니라 부지런한 덕까지 가져온다는 점을 체험해서 고맙다.”

호조판서를 비롯한 모든 신하들은 이 말에 감격했다. 이후 관리와 백성들 사이에는 검소의 기풍이 널리 실천되었고, 방석은 백여 년간 호조에 보존되었다.

이처럼 영조는 양반에게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자 했다. 일각에서는 영조가 이렇게까지 검소해진 연유로 궁궐 밖에서 생활했던 경험을 꼽는다. 영조는 어머니를 따라 18세(1712년)에 궁궐 밖으로 나가 10년간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생활했다. 이 기간 동안 자연스럽게 백성들의 어려운 사정을 알게 되었고, 임금인 자신부터 검소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지배계층인 양반을 대상으로 하는 제도 개혁의 명분을 찾으려면 왕 스스로 채찍질을 해야 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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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약과 애민정신이 반영된 정치

영조는 1734년 경제 업무를 담당하는 호조에 조세행정의 지침을 친필로 적어 하사했다. ‘균공애민 절용축력(均貢愛民 節用畜力)’. ‘조세를 고르게 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씀씀이를 절약하여 힘을 축적하라’는 뜻의 이 현판으로부터 영조의 애민정신이 느껴진다.

이러한 마음은 여러 제도를 통해 나타났다. 균역법이 대표적이다. 균역법은 16개월에 2필씩 내던 군포*를 1년에 1필만 부담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균역법 시행으로 백성들의 군포 부담은 반으로 줄어들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감소된 재정은 토지소유자와 부유한 양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보충했다.

상업, 공업, 어업 등에 종사하는 이들에게도 소득이 발생하면 세금을 부과하게 했다. 가난한 백성들의 부담은 줄이고, 재정적으로 여유 있는 양반과 지주들의 부담은 늘려 보편 과세와 공정 부담을 실현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이 밖에 각 도에 보고되지 않은 은결*을 면밀히 조사토록 하여, 세금과 관련한 폐단을 줄이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 군포: 조선시대 병역 의무자인 양인 남정(男丁:16세 이상 60세 이하)이 현역 복무에 나가지 않는 대신 부담했던 세금.
* 은결: 지주들이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서 국가에 등록하지 않고 숨겨놓은 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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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안정을 꾀하고자 했던 왕은 농본정책도 폈다. 1655년(효종 6년) 편찬된 농업서인 ‘농가집성’도 이때 널리 보급되었다. 1763년(영조 39년)에는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이 고구마 종자를 들여오기도 했다. 이를 통해 국내 최초로 제주와 동래 지역에서 재배가 시작되었다. 고구마는 훗날 흉년이 들었을 때 쌀을 대신하는 좋은 식량이 된다.

사대부들의 사치풍조가 사회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도 영조대 부터다. 1726년(영조 2년) 10월 17일, 부제학(副提學) 이기진(李箕鎭)은 사치의 폐해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

“선현이 말하기를, ‘사치의 폐해는 수해와 가뭄보다 심하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사치가 심하면 그 해의 곡식이 풍년이 들더라도 백성들은 여전히 배고픔을 면치 못함을 말한 것입니다. 하물며 요즘처럼 수해와 가뭄이 계속되는데, 극도로 사치하는 풍속까지 더해진다면, 백성들이 굶주려 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농촌에 오래 살아 농민의 생리를 그런대로 잘 알고 있습니다. 남자는 농사짓고 여자는 길쌈하며 일 년 내내 일하면서도 마음으로 바라는 것은 그저 한 사람이 한 해 살아갈 밑천입니다. 먹는 것은 곡식 두 포, 입는 것은 베 한 필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관청에 바치고 빚을 갚기에도 부족하여 끝내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고, 몸을 제대로 가리지도 못합니다. 도시의 여염에서 부자나 권세가가 낭비하는 것을 보면, 한 상 차림이나 옷 한 벌 값이 수십, 수백 농가의 재용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 비용이 나온 곳을 살펴보면 모두 농민이 힘써 경작한 것에서 빼앗아 온 것이니, 백성의 부모 된 자로서 이 얼마나 마음 아픈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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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소를 받은 영조는 유의하겠노라고 비답을 내렸고, 여러차례 사치풍조 금단 조치를 내렸다.

이 시기에는 금주령도 재차 내려졌다. 1733년(영조 9년) 한양의 쌀값이 뛰면서 품귀현상이 일어났을 때, 비국당상 김동필이 상소를 올렸다. “곡식을 소비시키는 것으로 술보다 더 심한 것이 없으니 엄중히 금지해야 합니다.” 영조는 이를 받아들였고, 금주령을 내린 이후에도 꾸준히 잘 지켜지는지를 묻곤 했다.

그밖에 홍수 때 범람을 막아 백성들의 집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시행했던 청계천 준천사업* 등 영조가 행했던 제도들은 일반 백성들을 향해있는 경우가 많았다.

평생 근검절약하는 생활을 했던 영조. 자신에게는 ‘추상(秋霜)’과 같았지만 백성들에게는 ‘춘풍(春風)’과 같았던 임금. 고단한 백성들의 삶을 위로하고자 영조가 실천했던 여러 가지 정책은 현대에 와서도 많은 부분 회자되고 있다. 52년이라는 긴 재위기간 동안 스스로 모범을 보이며 조선 중흥기의 발판을 마련한 왕.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청계천 준천사업: 17~18세기 한양 도성 내 인구 증가로 개천에 흘러드는 분뇨와 오물이 날로 늘어남. 숙종 때부터 개천 하상이 높아져 개천바닥이 다리 밑바닥까지 차오르게 됨. 1760년(영조 26년) 20만명의 인원을 동원해 57일간 대역사 진행. 이는 조선왕조 개국 초기 도성 축조에 버금갈 만큼 최대 규모의 사업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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