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재위 1863~1907년)이 그 누구보다 조선의 근대화와 독립을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던 왕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이번 왕의 경제학에서는 열강 사이에서 강소국을 꿈꿨던 고종의 근대 도시계획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또한 이를 현대의 도시 디자인과 연결 지어보는 과정을 통해 역사와 현대 경제를 아우르는 시간을 갖는다.
열강 사이에서 강소국을 꿈꾼 고종
고종의 재위 기간 44년은 우리에게 달갑지 않은 조선 역사의 한 페이지이다.
열강의 침략에 무능력했고 을사늑약(1905년)* 체결로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시켰다.
그러나 고종은 열강의 침탈 속 영국과 수호조약을 맺었고, 을사늑약 이후에는 국권회복을 위해 만국평화회의(1907년,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그는 열강 사이에서 조선의 국권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왕이었다.
고종은 즉위 34년째인 1897년 10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즉위와 함께 광무(光武)라는 연호를 쓰기 시작, 옷 또한 기존의 붉은색 곤룡포에서 황제가 입는 황금색 곤룡포로 바꾸었다.
이는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 아닌 자주적 독립국임을 대내외에 알리고자 함이었다.
대한제국 선포 직전까지(이후에도 계속됐지만)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치열한 패권 경쟁으로 인해 조선의 미래는 암울했다.
뿐만 아니라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등 혼란이 계속되었다.
1894년에는 조선의 지배권을 얻기 위해 청나라·일본이 조선 내에서 청일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을사늑약: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한국 정부를 강압하여 체결한 조약.

고종의 한성 근대화 프로젝트
황제 즉위 전후 고종은 이 같은 분위기를 일신하고자 했다.
가장 먼저 손 댄 것은 한성의 대대적 개조사업.
대한제국 선포 1년 전인 1896년 고종은 도로정비사업을 지시했다.
이때 정비된 길은 덕수궁(당시 경운궁)을 중심으로 지금의 태평로-세종로, 태평로-을지로, 태평로-소공로, 태평로-남대문 구간이다.
이는 미국 워싱턴의 도로를 빼닮았다.
치도사업(治道事業)의 주역이었던 박정양, 이채연이 미친 영향이다.
내부대신 박정양은 1887년 주미전권공사로, 한성부 판윤 이채연은이 당시 주미참사관으로 미국의 워싱턴을 다녀왔다.
치도사업은 성공적이었다.
불과 1년이 채 되지 않은 1897년 봄, 성과가 나타났다.
영국 출신의 여행가이자 지리학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쓴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는 당시 고종의 치도사업 성과가 잘 묘사돼 있다.
비숍은 “한성은 많은 면에서, 특히 남대문과 서대문 근방의 변화 때문에 예전과는 다르게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도로들은 최소한 17미터의 폭으로 넓어졌고 양쪽에는 돌로 만들어진 깊은 경계가 있으며 그 중앙은 돌의 후판(厚板)으로 메워졌다.
그 도로들이 있던 자리는 원래 콜레라가 발생했던 불결한 샛길들이 있던 곳이다.
좁은 오솔길은 넓어졌고 진흙투성이의 시내는 포장도로에 의해 사라지고 없었다”고 당시 한성의 풍경을 설명하고 있다.
당시 치도사업은 큰 길은 조선 정부가, 작은 소로는 시민들이 자가 정비하는 방법으로 추진됐다.
1896년 10월 20일자 독립신문은 당시 치도사업에 대해 “큰 길은 정부에서 수리하거니와 각 동리의 거리와 작은 골목길을 그 동리에서 수리하되 길과 문 앞을 편리하고 정결하게 하기 위해 내부 훈령을 받들어 방을 붙이니 인민들은 다 알고 준행해 어김이 없게 하라”고 전하고 있다.

‘근대도시’를 표방했던 ‘한성’에는 반듯하게 닦인 대로뿐 아니라 근대적인 공원도 필요했다.
창덕궁 후원 등 왕이 기거하는 궁궐에 정원이 존재하긴 했지만, 시민을 위한 근대적 공원은 부재했다.
이러한 시기(1879년 경)에 탑골공원이 조성되었다.
고종 34년 조성된 탑골공원은 조선 최초의 도심 내 공원으로 당시 총세무사로 있던 영국인 맥리비 브라운이 설계했다.
서양은 대개 도심 공원을 조성하여 산업혁명으로 악화된 도시 위생을 개선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산업혁명을 겪지 않았다.
고종의 도시공원 조성은 위생보다는 한성이 ‘도심공원 가진 근대도시’임을 내·외국인에게 알리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고종의 ‘한성 근대화 프로젝트’는 다양하게 반영되었다.
경운궁 수리를 시작하며 여러 전각들을 새로 세웠고, 중명전, 정관헌, 구성헌 등 서양식 건물을 신축하기도 했다.
이 역시 궁을 찾는 외국 관료들에게 조선이 개명한 국가임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그밖에 전기·전등·전화기·자동차·전차를 도입하는 등 고종은 근대화를 서둘렀다.
비록 그의 숙원은 일본에 의해 꺾였지만(일본은 1907년 헤이그 밀사 파견을 문제 삼아 고종을 협박, 황태자인 순종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줄 것을 요구) 그의 노력은 아직까지도 서울 곳곳에 녹아 있다.
○ 시장금리, 다시 올라갈 가능성은? ▷
○ 저금리ㆍ고령화 시대 포트폴리오에 변화를 주자! ▷
카카오가 제공하는 증권정보는 단순히 정보의 제공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사이트에서 제공되는 정보는 오류 및 지연이 발생될 수 있습니다.
제공된 정보이용에 따르는 책임은 이용자 본인에게 있으며, 카카오는 이용자의 투자결과에 따른 법적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Copyright (c) Kakao Corp. All
rights reserved.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사 또는 글쓴이에 있으며 카카오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