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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금융제국 투자법 ④바클레이스&도이체방크
추천 2 | 조회 4555 | 번호 4261 | 2015.05.29 17:46 펀드슈퍼마켓 (simamoto1***)

우여곡절 많았지만 탄탄한 기본기로

여전히 실력 발휘





• 프리미어리그의 상징 ‘바클레이스(Barclays)’


축구 종가이자 세계 최고의 리그로 꼽히는 영국 프리미어리그를 보면 유달리 눈에 띄는 문양과 이름이 있다. 왕관을 쓴 채 왼발로 축구공을 짚고 있는 숫사자와 ‘Barclays’라는 문구가 바로 그것인데, 이 바클레이스는 영국을 대표하는 투자은행의 이름이다.

지난 2001~02시즌부터 프리미어리그와 스폰서계약을 맺어온 바클레이스는 세계 최고 부자가운데 하나로 잘 알려진 ‘만수르’가 최대 주주인 것으로 유명세를 탔다.

바클레이스는 세계 금융시장에서 오랜 역사로도 인정받는 명문가다. 1690년 런던에서 시작된 바클레이스는 300년이 훌쩍 넘는 전통을 지녔다.

영국은 금융강국이지만 보수적인 문화가 강해 새로운 금융시스템 도입에는 다소 시간이 걸리는 나라다. 바클레이스는 이런 영국에서 ‘최초’라는 타이틀을 여럿 보유하고 있지만, 의외로 도입 시기는 늦은 편이다.

영국 최초의 신용카드인 ‘바클레이카드’가 출시된 것은 1966년으로, 바클레이스가 설치한 첫 현금지급기가 등장한 것도 이때였다.

2008년 발생한 글로벌 금융위기는 바클레이스가 손꼽히는 글로벌 금융기업으로 도약하게 해주는 계기가 됐다.

바클레이스는 2008년 9월 미국의 거대금융재벌이자 ‘리먼사태’로 전 세계 금융시장을 공포로 몰아넣은 ‘리먼브라더스’를 전격 인수했다. 당시 바클레이스는 리먼브라더스의 투자금융 및 거래 부문을 매입하고, 리먼브라더스의 뉴욕 본사 건물도 인수했다.



금리조작, 정보유출… 잇단 스캔들로 홍역


300년 넘게 금융명가로 자리해온 바클레이스는 2000년대 들어 연이은 스캔들에 휘말리며 명성에 금이 간 상태다.

바클레이스는 2007년 글로벌 기준금리격인 리보(Libor, 런던은행간 금리) 조작사건에 연루됐다는 의혹을 받아 거액의 벌금을 물고 회장이 물러나는 상황까지 맞았다.

리보는 매일 오전 11시10분(런던시각 기준) 런던 16개 은행의 리보 결정 위원들이 각 은행의 차입 금리를 영국은행연합회(BBA)에 보고하면 이 중 가장 높은 금리와 낮은 금리를 뺀 평균을 구해 오전 11시30분에 발표된다.


영국에서 정해지는 금리임에도 큰 후폭풍을 일으킨 것은 리보가 전 세계 금융거래에서 일종의 기준금리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국의 은행이 영국의 은행에서 돈을 빌릴 경우 리보를 기준으로 신용도에 따라 가산금리를 더하거나 빼는 식이다. 이 때문에 리보가 1bp(0.01%포인트)만 움직여도 글로벌 자본 흐름에 막대한 변화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리보에 연동하는 전 세계 금융상품 규모는 무려 400조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어 2014년에는 고객 정보 유출 사태로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영국 현지 언론 등에 따르면 당시 바클레이스는 재무 설계 서비스를 이용한 고객의 개인정보 서비스가 불법 유출되고 심지어 팔리기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련의 사건을 겪었지만 바클레이스는 여전히 영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금융회사다. 바클레이스는 서울을 포함해 전 세계 3000여 개의 영업지점을 운영 중이며, 개인금융을 비롯해 기업금융과 부동산, 투자경영 등을 주력으로 삼고 있다.



• 세계 최대의 외환딜러 ‘도이체방크(Deutsche Bank)’


독일을 대표하는 도이체방크는 글로벌 금융의 ‘조상’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일찌감치 세계투자시장에 진출한 금융사다.

1870년 문을 열자마자 아시아와 미주 대륙 등에 진출해 대규모 투자 사업을 벌여 급성장을 거듭했다.

설립 2년 후인 1872년 중국 상하이에 진출했고, 1873년에는 런던지점이 문을 열었다.

1888년에는 미국의 북태평양 철도사업, 이라크 바그다드의 철도사업에 진출했다. 국내 금융회사들이 여전히 글로벌 금융시장 진출에 애를 먹고 있는 우리 현실과 비교하면 100년 이상 앞서갔던 셈이다.

세계시장 진출을 발판삼아 도이체방크는 1900년대 초 명실상부한 세계최대은행에 등극했다. 특히 글로벌 금융사가 드물던 시절 일찌감치 세계시장에 눈을 뜬 덕에 세계 외환중개 시장을 장악하며 외환딜러의 대명사로 자리 잡기도 했다.

하지만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자 도이체방크는 해외자산 대부분을 몰수당하며 큰 타격을 입었다.

물론 이 와중에도 도이체방크는 영화제작사인 UFA를 설립하고 다임러와 벤츠의 합병을 주도하는 등 투자은행으로서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나치 비밀은행’ 오명 딛고 재기


위상을 회복해가던 도이체방크는 히틀러 집권기간 동안 나치에 협력한 전력이 드러나 또 한 번 곤욕을 치뤘다.

도이체방크는 히틀러가 집권한 시기 세 명의 유태인 이사를 해임하고 유태인 소유의 사업체 수백 개를 다른 민족에게 넘기는 등 나치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독일 비밀경찰인 게슈타포의 자금 운영기관 역할을 했으며,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짓는 자금을 제공한 사실이 밝혀져 유태인 희생자 가족과 생존자들을 위해 52억 달러의 보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특히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한 뒤 도이체방크는 10개의 지방은행으로 분할돼 사실상 공중분해되는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도이체방크가 옛 영광을 회복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뿔뿔이 흩어졌던 은행 가운데 노르드 도이체방크, 쥐드 도이체방크, 라이니쉬 베스트펠리셰 방크가 1957년 합병을 통해 프랑크푸르트에 본부를 둔 도이체방크로 다시 탄생했다.

이후 전공인 외환시장에서 실력을 발휘해 외환딜러 시장 점유율 20%를 차지하며 세계 최대의 외환딜러 자리를 되찾았다.



글. 정일환 기자(imthetop@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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