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공은행 (農工銀行)
( * 1906년(광무 10) 3월에 제정된 농공은행조례에 의하여 1906~07년에 걸쳐 전국 주요도시에 설립된 지방은행.)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다 수타로[目賀田種太郞]가 식민정책의 하나로 농업과 공업의 개량·발달을 위한 자금대부를 표면상의 이유로 내세워 설립을 추진하였다.
일본흥업은행으로 하여금 농공은행의 운영권을 장악하게 하기 위해 일본흥업은행의 자금을 조달하려 하였으나, 자금난으로 그 의도가 무산되고 한국인 자본가에 의하여 관찰사 소재지에 설립되었다.
1906년 한성농공은행을 시발로 평양·대구·전주·진주·광주·충주·해주·경성·공주·함흥 등 전국에 11개의 농공은행이 설립되었다. 이후 합병과 증설을 거쳐 1910년 10월말 현재 27개의 지점·출장소가 있었다. 이사진은 한국인들로 구성되었으나, 실무책임자인 지배인에는 일본인이 임명됨으로써 일본인에게 유리하게 운영되었다. 그리고 애초의 목표와 달리 한국에 이주한 일본인들의 사업자금을 지원하는 데 주력하여 농업·공업에 대한 자금 지원보다 상업자금 지원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또한 동양척식회사의 업무를 대행하게 되면서 일본인들의 식민지 정착을 위한 농토구입 자금까지 공급하였다. 1918년 농공은행을 모체로 설립된 조선식산은행에 흡수되었다. → 조선식산은행
[ 출처 : 브리태니커 / 한국브리태니커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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