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트실트가 [ Rothschild Family ]
( * 가장 유명한 유럽의 은행가 가문. )
개요
약 200년 동안 유럽 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면서 정치사에도 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집안을 세운 사람들은 마이어 암셸 로트실트(1744. 2. 23 프랑크푸르트 암마인~1812. 9. 19 프랑크푸르트)와 5명의 아들인 암셸 마이어(1773. 6. 12 프랑크푸르트~1855. 12. 6 프랑크푸르트), 잘로몬 마이어(1774. 9. 9~1855. 7. 27 빈), 나탄 마이어(1777. 9. 16~1836. 7. 28 프랑크푸르트), 카를 마이어(1788. 4. 24~1855. 3. 10 나폴리), 야코프(또는 제임스 1792. 5. 15~1868. 11. 15 파리)이다. 이들은 프랑크푸르트의 한 은행으로부터 출발해 1820년대에는 런던·파리·빈·나폴리에 지점을 둔 국제은행가로 성장했다.
마이어 암셸 로트실트
집안을 세운 장본인은 바로 마이어 암셸이다. 로트실트라는 가문의 이름은 한때 유대인 빈민가에 살던 마이어의 선조들의 집 지붕장식인 빨간색 방패(rot shield)에서 비롯했다. 마이어는 잠시 랍비가 되려는 뜻을 품고 공부했으나 부모가 일찍 죽는 바람에 한 은행에 실습생으로 들어갔으며, 뒤에는 헤센카젤의 백작 영주 빌헬름 9세의 궁정에 들어갔다. 바로 이 마이어가 통치가문과 거래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아들을 낳아 여러 해외업무를 맡긴다는 가풍을 세웠으며, 이러한 가풍은 그뒤로 계속 이어졌다.
5명의 아들
마이어와 아들들은 사치품 장사와 화폐·상업어음 거래로 시작했으며 프랑스 혁명과 1792~1815년 나폴레옹 전쟁에 크게 힘입어 은행가로 성장했다. 마이어와 맏아들 암셸 마이어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사업확장을 관리했고 셋째 나탄은 1804년 런던에, 넷째인 야코프는 1811년 파리에 지점을 개설했으며 1820년대에 잘로몬과 카를이 각각 빈과 나폴리에 사무실을 열었다. 이들은 전쟁이라는 기회를 활용해 전쟁을 치르고 있는 제후들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밀·목화·식민지산물·무기 같은 주요물자를 합법적으로 거래하는 한편 밀수를 하기도 했다.
또한 영국과 대륙 간의 국제지불을 대체하는 일을 통해 영국 무역을 봉쇄하려는 나폴레옹의 노력을 헛되이 만드는 데 한몫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자 이들은 한창 성장하던 사업의 양상을 바꾸었다. 은행들은 국제 영업 거래를 계속하면서도 정부 공채(프로이센·영국·프랑스·나폴리), 보험회사 증권, 기업 주식을 중개하는 일을 더 많이 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산업혁명에 잘 적응했으며 철도, 석탄, 철제품 제조, 야금술(冶金術)에 투자함으로써 유럽 전체 경제성장에 이바지했다. 1850년대 이후에도 은행들은 성장을 거듭해 특히 석유와 비철금속 부문 국제무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때까지의 '과점적'(寡占的) 지위는 독일에서는 물론 영국·프랑스에서 새로운 합자(合資)은행이나 '상업'은행, 즉 예탁은행들이 등장함에 따라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19세기말경 로트실트 그룹은 더이상 최대의 은행 합동기업이 아니었으며 그보다 더 튼튼하고 부유하며 진취적인 은행 그룹들이 유럽과 미국에 등장했다. 그러나 마이어 암셸이 기업운영을 위해 세운 2가지 지침(사실상 가훈이 됨), 즉 모든 업무는 공동으로 운영한다는 것과 지나친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업가로서의 자질이 없을지도 모르는 후손들에게 사업을 물려주는 데 따른 불가피한 위험부담을 상당히 상쇄시켜 주었다.
로트실트 합동기업을 세운 암셸 마이어, 나탄, 야코프, 잘로몬, 카를 형제들은 서로 똑같은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 가운데 나탄과 야코프는 두드러지는 성격을 가졌다. 특히 나탄은 무정하고 일부러 야만스러운 행동을 하며 빈정대는 태도를 보이곤 했다. 야코프도 이런 점에선 나탄과 똑같았지만 파리의 한층 세련된 분위기에 살았던 덕분에 조금은 나은 부드러운 인상을 주었다. 이들 창립자 5명의 후계자들도 똑같지는 않았다.
파리에서 활동한 야코프의 아들 알퐁스(1827~1905)가 아버지의 뒤를 이을 자격이 있었다면, 알퐁스의 아들 에두아르(1868~1949)는 그 자리에 어울리는 강한 사람이 못되었다. 그러나 에두아르의 아들 기(1909~)와 사촌 알랭(1910~1982), 엘리(1917~)는 상당한 적응력과 야심을 보이면서 150년 동안 이어온 그룹 전통을 공고히 했고 기회를 포착해 정치나 사업에 적용하는 데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로트실트 가문의 후손들은 모두 비슷하게 국제 금융·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제2세대
19세기에 주도권을 잡은 이 집안의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측면과는 별도로, 주변상황만을 생각한다면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즉 로트실트가의 제1세대는 언어와 풍습도 모르는 낯선 나라에 도착해 그 지역 은행가들의 질투와 경쟁의 대상이 되어야 했지만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겠다는 강렬한 의지로서 주위 상황으로부터 두각을 나타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5형제들의 아들들(특히 런던의 앤소니와 라이오넬 네이선, 파리의 알퐁스와 구스타브가 주목할 만함)이 사업에 뛰어들었을 무렵 로트실트가는 많이 세련되었으며 가문의 특징을 지켜나가면서도 그 사회의 지도적 지위로 편입할 만큼 그 나라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런 큰 변화는 로트실트 가문의 젊은이들이 받은 교육과 여러 친척 가장들의 지극히 세속적인 지위 덕분에 가능했던 것 같다. 한편 로트실트가 사람들은 자기들이 속한 나라의 영향을 받은 만큼 그 나라의 정치·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알퐁스는 국제은행 신디케이트 회장으로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진 프랑스에게 1871년과 1872년 2차례에 걸쳐 해방대부금(解放貸付金)으로 거액을 내주었는데, 자신의 영향력 덕분에 프랑스 대통령 아돌프 티에르가 권력을 유지했다고 당당하게 자랑하곤 했다.
한편, 런던에서 1858년부터 하원의원을 지낸 라이오넬은 1875년 통지를 받은 지 몇 시간 안에 400만 파운드를 대부해주어 영국 정부가 수에즈 운하 회사의 대주주가 될 수 있도록 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들 두 사촌은 각각 그들이 사는 나라에서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로트실트가는 사촌들끼리 결혼하는 일이 자주 있었고 매우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혼상대는 유대인이었다. 후손들의 수가 많아져 가계가 매우 복잡해졌지만 나치 시대에 빈과 파리에 살던 식구들을 비롯한 로트실트가 사람들은 단합하여 그들에게 닥친 커다란 불행을 이겨내었다.
이들은 많은 영예를 누렸다. 마이어의 5명의 아들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남작이 되었고, 또 그 후손들 가운데에는 유대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의회의원이 된 사람도 있으며, 처음으로 영국귀족이 된 사람도 있다. 영국으로 건너간 이 집안의 가장인 나탄은 늘 영국 유대인 사회의 비공식적 우두머리로 여겨졌다. 영국과 프랑스에 자리잡은 식구들은 나치의 손에 오스트리아 집안이 점령당한 뒤에도 유일하게 계속해 은행업에 종사했으며, 과학자로서 때로는 박애주의자로서 이름을 떨쳤다. 필리프 드 로트실트 남작(1902~88)은 프랑스에서 무통-로트실트 포도원을 운영해 최고의 포도주 양조업자가 되었다.
[ 출처 : 브리태니커 / 한국브리태니커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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