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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거가 [ Fugger family ]
추천 0 | 조회 226 | 번호 3760 | 2015.04.24 10:48 금융 (finance1.***)

푸거가 [ Fugger family , ― 家 ]


( * 독일의 상업·금융 가문. )


개요


15, 16세기 유럽의 상업계를 독점하며 자본주의 경제 개념을 발전시키고 유럽의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창업주


창업주 한스 푸거는 슈바벤의 그라벤 마을출신의 직물업자로, 1367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가문을 일으켰다. 부지런했던 그는 직물업 길드의 마이스터의 딸들과 2차례의 결혼을 통해 공민권과 회사설립의 자유를 획득했다. 12명으로 구성된 길드 위원회와 시의 대평의회의 성원이 되었고 섬유무역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408년 그가 죽은 후 아들 안드레아스와 야코프 1세는 둘 다 금세공업을 배워 합작경영으로 가업을 이어가다 1454년 서로 분가했다. 


둘 중에 사업수완이 더 뛰어난 안드레아스와 그의 자손들은 빠른 속도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으나 무리한 사업확장과 소송 패소 등으로 인해 1499년 파산했다. 그후 이 '푸거 폼 레'(그들의 문장에서 유래) 후손은 독일 남부·동부·중부에 흩어져 살았으며 최근 1944년에는 폴란드 바르샤바에 푸거가의 후손인 푸키어가 살았다. 1441년 야코프는 조폐국장의 딸과 결혼했다. 장인은 3년 후에 파산했는데 이를 지켜 본 야코프는 사업에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그는 인내와 근면으로 재산증식에 성공했으며 1463년 상급 상인 길드의 구성원이 되었다. 1469년 그가 죽은 후 7명의 아들 중 울리히와 게오르크 두 사람이 국제무역으로까지 사업영역을 확장했다.


1473년 백합이 그려진 문장을 하사받았으며 이로써 이 분가는 '푸거 폰 데어 릴리'라 불렸다. 그들은 로마에 있는 형제 마르쿠스의 도움으로 면죄부 판매대금의 교황청 송금과 교회수익금 관리를 맡았다. 1508~15년 그들은 로마 교황청 자금을 차용했다. 울리히와 게오르크는 베네치아에 있는 독일 상인조합건물 내에 지점을 설치했다. 그곳에서 막내 동생 야코프 2세가 성직자의 길을 포기하고 1478년 이래로 근대회계학을 공부했다. 


야코프 2세는 1485년 인스브루크 소재 푸거 지점을 맡아 탁월한 사업 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지기스문트 대공과 막시밀리안 국왕(뒤의 신성 로마 황제)에게 영구차관을 제공하는 대신 그에 대한 담보로 은과 구리의 채취권을 따냄으로써 티롤의 광산에 뛰어들었다. 이같은 모험투자에서 막대한 수익을 얻은 푸거가는 슐레지엔 광산개발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치밀하고 냉정하면서도 과감한 투자를 서슴지 않은 야코프는 슐레지엔 광산에서 만난 한 채광 전문가와 함께 노이솔(지금의 슬로바키아 반스카 비스트리차)의 구리광산을 임대해 노이솔을 당대 최고의 광산 중심지로 만들었다.


1494년 푸거가는 5만 4,385길더의 자금으로 처음으로 주식공모회사를 설립했다. 야코프는 2년 후 브리헨의 주교군주를 설득, 비공개 투자자로 참여하게 함으로써 자본금을 2배로 늘렸다. 야코프의 목표는 호엔키르헨과 푸거라우(푸거가의 이름에서 유래, 지금의 오스트리아 케른텐에 있음)에 주물공장을 세우고 특히 안트웨르펜 등 유럽 내 판매조직을 확장함으로써 구리산업을 독점하려는 것이었다. '될 수 있는 한 확장한다'라는 그의 원칙대로 수익성이 좋은 향료 무역 등 모든 형태의 사업에 뛰어들었다. 한편 그는 1498년 이후로 불행한 결혼생활을 유지했으며 뒤를 이을 자식도 없었다. 


침착하고 추진력이 강한 그는 오래 전부터 회사의 방향을 정해두고 있었다. 회사의 주요채권자인 브리헨의 주교가 죽자 교황이 그의 재산상속권을 주장했고 야코프는 냉정한 협상을 통해 위기를 넘겨야 했다. 그는 신중하게 회사의 자산을 현금지분·생산공장·상품·토지자산·귀금속 등으로 균등하게 배분했다. 그리고는 1504년 바젤 시로부터 부르고뉴 공 샤를의 압류된 왕실 보석 일부를 비밀리에 구입했다. 그는 또 푸거가가 소유한 광활한 토지 소유의 기초를 마련, 1507년 막시밀리안 1세로부터 키르흐베르크와 바이센호른 공국을 획득했다. 


1514년 막시밀리안 황제는 그에게 백작작위를 내렸다. 1490년 이래로 막시밀리안 1세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야코프는 막시밀리안의 황제권 요구에 대해서는 지지를 거부했지만 어쨌든 그의 정책과 노선을 같이했다. 야코프는 막시밀리안의 후임 황제로 카를 5세를 선출하는 데 재정을 지원했다. 총 85만 2,000길더의 선거자금 중 야코프는 약 54만 4,000길더를 지원함으로써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의 선출을 막았다. 그는 교묘한 협상으로 스페인 왕가에 3대 기사단이 지불하는 기금을 빌려주는 차용금인 '마에스트라스고'로 부채를 상환했다. 선거기금의 일부는 알마덴 수은광산과 구아달카날 은광산으로부터 조달했다. 1516년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에게도 다양한 차관을 제공함으로써 국왕과 밀접한 교분을 가졌다.


전성기를 맞이한 야코프 푸거는 독일의 인문학자이며 개혁주의자인 울리히 폰 후텐과 마르틴 루터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들은 야코프의 융자정책뿐만 아니라 이자징수 제도(푸거가는 교황에게 중세의 이자징수 금지제도의 폐지 또는 개정을 요구하는 부호가문들 중의 하나였음), 면죄부와 성직 판매에 대한 태도에 대해 비난했다. 뉘른베르크 황실의 회계 및 행정 당국은 야코프와 다른 부호들에 대해 독점적 성향을 중단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더욱이 티롤 광산과 헝가리의 노이솔 광산에서 발생한 광부들의 소요와 헝가리 귀족들의 광산국유화 시도, 그리고 농민 반란 등으로 푸거가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아우크스부르크 회사본부에서는 숙련공들이 봉기를 일으켜 그를 당황하게 했다. 그는 이같은 위기를 순수하고 확고한 목적을 가지고 극복해나갔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부호 야코프의 냉정하고 과묵한 태도를 칭송한 적이 있다. 그만큼 야코프 푸거는 회사 대표로서 부족한 점이 없었지만 수세기 동안 지속될 기념비적인 사업을 고안해냈다. 푸거가의 건물들, 웅장한 교회, 무엇보다도 가난하고 늙은 하인과 시민들에게 평화로운 천국이 된 세계 최초의 빈민구제시설인 푸거라이를 만들었다. 따라서 그의 말년에 사업과 그의 교회가 종교개혁에 의해 위협을 받게 되자 그는 종교개혁에 맞서 싸웠다.


가문의 쇠락


1525년 세상을 떠날 때 부호 야코프는 이미 1517년 이후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조카 안톤 푸거에게 사업을 물려주었다. 야망과 재능 있는 기업가였던 안톤은 확고한 태도로 기업을 이끌어갔다. 그는 귀족의 딸인 안나 레링거와 결혼해 4명의 아들을 두었다. 안톤의 시대 대부분은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 스페인의 페르난도 1세와 펠리페 2세에 대한 영구차관제공에 사업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전쟁의 승패는 자금에 달려 있다는 그의 신조대로 엄격한 가톨릭 교도였던 안톤 푸거는 황제에게 융자금을 제공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에 맞선 전투, 특히 프로테스탄트 제후와 도시들로 구성된 슈말칼텐 동맹에 대항한 전쟁에서 결정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그는 잉글랜드에 퍼스티안 옷감을 수출하고 잉글랜드 국왕들에게 융자를 제공해 사업적 성공을 거둔 반면, 티롤과 헝가리의 광산들은 생산량이 줄었으며 1547년 노이솔 광산은 포기했다. 이러한 광산에서의 결손을 충당하기 위해 그는 페루·칠레와 무역을 개설하고 스웨덴·노르웨이의 광산에 신규투자했으며 심지어 아프리카 노예를 아메리카에 수출하는 노예무역에까지 손을 댔으나 별다른 수익을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향료무역과 헝가리 가축 수입에서는 성공했다. 


스페인에서는 스페인 국내 감정문제로 마에스트라스고 융자가 1542년 이후로 중단되고 구아달카날 은 광산도 문을 닫았다. 그럼에도 안톤 푸거는 1546년까지 510만 길더를 축적, 푸거 가문 역사상 최고의 자본금 기록을 세웠다. 1540년 건강이 쇠약해진 안톤은 푸거가 재산의 미래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다. 아들과 조카들이 사업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자 그는 기업해체까지 고려했다. 이런 극단적인 방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그는 고집스럽게 사업을 지속시켰다. 1560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푸거가의 자산은 560만 길더, 채무는 540만 길더(스페인에만 290만 길더)였다. 


그러나 안톤은 바덴하우젠을 비롯한 다른 지역의 토지를 적기에 매입함으로써 자산의 일부를 지켰다. 1543년 안톤의 조카 한스 야코프 푸거가 사업 파트너로 뛰어들었으나 개인적으로 파산하고 결국은 바이에른의 총리가 되었다. 그후 안톤의 큰아들 마르쿠스는 비록 줄어든 규모이기는 했으나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563~1641년 푸거 회사는 알마덴에서 수은 생산만으로 5,000만 두캇을 벌어들였다. 그러나 30년전쟁이 지난 후 푸거회사는 완전히 해체되고 말았다. 야코프와 안톤 푸거가 백작의 지위를 거의 이용하지 않았던 반면, 상업에 별 관심이 없던 후손들은 유럽의 여러 대학에서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다. 


후손들은 그들의 계급 내에서 결혼하고 대부분의 생애를 가문의 영토에서 지내면서 도서관을 설립하고 웅장한 저택을 건립했다. 16세기 중반 이래로 푸거가의 3대 가계가 형성된 것은 야코프와 안톤이 구입한 광대한 토지 덕택이었다. 그 가계는 오버키르히베르크의 푸거 키르히베르크 백작, 키르히하임의 푸거글뢰트 공, 바덴하우젠의 푸거 바덴하우젠 공으로 이들 3개 가계는 한때 푸거가 회사가 소유했던 막대한 부의 일부를 지킬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푸거가는 초기 자본주의 시대 무역회사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의 경제 개념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사용한 방식은 당대나 지금이나 격렬한 비판과 찬사를 동시에 받고 있다.


[ 출처 : 브리태니커 / 한국브리태니커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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