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서비스

검색

검색어 입력폼

금융 메인메뉴

커뮤니티

커뮤니티 하위메뉴

게시판 운영정책

전문가칼럼

증권파동
추천 0 | 조회 40 | 번호 3695 | 2015.04.23 15:18 금융 (finance1.***)

증권파동 [ 證券波動 ]


( * 1962년 5월을 전후해 일부 증권업자에 의해 대한증권거래소 주식 등 주력주가 매점되고 투기가 과열되어 결재일에 이르러 주식거래대금이 결재되지 못해 일어난 일련의 사태. )


5월증권파동이라고도 한다. 소위 4대의혹사건의 하나이다. 1961년말부터 시작된 투기성향의 '증권 붐'인 증권파동의 배경이 되었는데, 5·16군사혁명 이후 정부의 적극적인 증권시장육성정책에 힘입어 투기성 자금이 증권시장에 집중되고 있었다. 


당시 중앙정보부 행정처장 이영근, 관리실장 정지원 등은 농업협동조합(농협)중앙회장 오덕준, 부회장 권병호를 협박해 1962년 2월 10일부터 3월 초순경까지 8차례나 수의계약 명목으로 농협이 보유하고 있던 인기주인 한국전력주 12만 8,000주를 시가보다 5% 싼 가격으로 교부받았다. 이로써 얻은 8억 6,224만 6,400환을 영화증권 사장 윤응상에게 자본금으로 대주어 통일·일흥·동명 등 3개의 증권회사를 설립한 뒤, 윤응상의 심복인 서재식을 증권거래소 이사장으로 내세우고 무모한 주식 매진(買進) 행위를 감행, 윤응상계 증권회사의 주가를 폭등시켰다. 


그러나 이들 3개 회사는 5월말에 예정된 수도결제(受渡決濟)를 이행하지 않아 주가가 급전직하로 폭락했으며 5,340명에 달하는 군소투자가들이 138억 6,000만 환의 엄청난 손해를 입고 자살소동을 빚기도 했다. 사건 후 이영근·윤응상·서재식 등은 특별법 제2조 위반 및 업무상 배임과 횡령죄로 입건되었다. 증권파동은 당시 군사정권이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저지른 사건으로 엄청난 자금의 행방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4대의혹사건


[ 출처 : 브리태니커 / 한국브리태니커회사 ]

0
0
신고


푸터

카카오가 제공하는 증권정보는 단순히 정보의 제공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사이트에서 제공되는 정보는 오류 및 지연이 발생될 수 있습니다.
제공된 정보이용에 따르는 책임은 이용자 본인에게 있으며, 카카오는 이용자의 투자결과에 따른 법적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Copyright (c) Kakao Corp. All rights reserved.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사 또는 글쓴이에 있으며 카카오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