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의 재위기간은 10년으로 조선 역대 왕의 평균 재위기간인 19년의 절반에 불과하다.
재위기간은 짧은 편이지만 병자호란 직후 세자 시절 8년간 청나라에서 볼모로 지낸 뒤 북벌을 꿈꾸다 마흔 한 살의 나이로 급사한 효종의 일생은 그 어떤 왕보다도 드라마틱하다.
하지만 부국강병을 꿈꾸며 북벌정책과 대동법을 시행한 효종이 없었다면 영조·정조 시대의 경제 부흥은 불가능했다.

효종의 동전, 화폐경제 발달의 방아쇠
효종이 처음으로 화폐유통을 추진했던 것은 아니었다.
세종·인조도 화폐유통 정책을 추진했다.
인조는 두 차례 화폐유통을 추진했지만 정묘호란·병자호란, 연이은 흉년 때문에 화폐유통 정책은 중단됐다.
효종은 즉위 첫 해인 1649년 김육(金堉, 1580~1658년)의 건의를 받아들여 화폐유통정책을 추진했다.
이렇게 등장한 동전이 ‘십전통보(十錢通寶)’이다.
효종2년(1651년) 처음 등장한 십전통보 하나의 값어치는 10전에 해당돼 기존의 동전과 비교하면 고액권에 해당됐다.
효종은 십전통보 외에도 인조 대에 유통됐던 동전은 물론 백성이 사전(私錢:개인이 만든 돈)*을 사용하도록 허락하는 등 화폐 유통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안을 추진했다.
효종이 화폐유통을 추진한 이유는 지불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쌀과 포목(면포·베포)의 문제점 때문이었다.
쌀은 운반에 비용이 많이 들고 부패되기 쉬웠다.
포목도 문제가 있었다. 쌀은 소액거래에 이용됐지만 포목으로는 소액 거래가 쉽지 않았다. 포목은 자르는 순간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주로 고액 거래에 이용됐다.
더구나 포목의 질이 떨어지면서 발생하는 문제도 적지 않았다.
16~17세기 들어 계속된 목화 농사 흉년으로 인해 면포의 품질은 떨어졌고, 이러한 추포(麤布:질이 떨어지는 면포)*가 유통되면서 시장의 물가 폭등이 심각해졌다.
효종은 화폐유통 정책과 함께 ‘추포금단’(麤布禁斷) 조치를 시행해 화폐유통의 활성화를 꾀했다.
또한 세금 납부에 있어서도 동전 수납을 가능케 했다.
세금을 내기 위해 백성이 화폐를 구하게 되면 자연스레 화폐 유통이 활발해질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후에는 대동법 시행에 따라 거두어들이는 대동미의 일부도 동전으로 수취했다.
효종 6년(1655년)에는 대동미 1결8두 중 1~2두를 동전으로 수납하도록 했다.
하지만 효종이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화폐유통 정책은 오래가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 점은 주전 원료(구리와 납)의 부족, 화폐에 대한 백성의 인식부족이었다.
화폐유통은 효종1년(1650년) 평양·안주를 중심으로 시행돼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1년 뒤에는 한양, 효종3년부터는 경기 지역, 5년째부터는 삼남지방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화폐유통이 너무나 급진적이었다. 단기간에 확대되면서 동전원료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효종3년부터 한양·경기지역으로 화폐유통을 확대하면서 녹봉의 일부를 동전으로 지급하는 방안이 추진됐지만, 주전량이 부족해 다음해부터는 중단되기도 했다.
유통량도 문제였지만 화폐의 가치도 불안정했다. 물가에 따라 변동이 심해 화폐로서의 역할을 하기 어려웠다.
화폐의 가치가 불분명하자 일부에서는 동전을 녹여 그릇을 만드는 일도 빈번하게 벌어졌다. 유통량은 더욱 줄어들었다.

결국 효종7년(1656년) 화폐유통을 둘러싼 논쟁이 본격화됐고 그 해 9월 이시방(李時昉, 1594~1660년)이 화폐유통 중지를 요청하면서 효종의 화폐유통 정책은 중단된다.
효종의 화폐유통 정책은 효종대에는 실패로 끝나게 됐지만 조선 후기 화폐경제의 발달에는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화폐 유통 정책은 효종 사후 19년 뒤인 숙종4년(1678년) 상평통보(常平通寶)의 주조가 시작되면서 되살아난다.
상평통보는 효종 의 화폐유통 정책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 몇 가지 강구책이 마련됐다.
사주전을 처벌하고 동(銅)으로만 주조하게 하는 한편 대전(大錢)·소전(小錢, 대전의 1/4)으로 차별을 둬 차이를 두었다.
또 주전원료의 확보를 위해 동광의 개발, 왜동(倭銅)의 수입 등이 추진됐다.
숙종대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되자 화폐 이용층은 효종대의 상인·부호층 중심에서 일반 백성까지 확대된다.
숙종6년(1680년)까지는 면포를 이용한 매매가 80% 이상이었지만 동전을 이용한 매매는 1690년대 30.3%에서 1700년대 60%로 증가했고 1710년대에는 90%에 달하게 됐다.

화폐의 유통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숙종·영조대에 걸쳐 몇 가지 변화가 발생했다.
관료의 봉급도 동전으로 지급되는 것은 물론 물건과 주택·토지 등도 동전으로 매매됐다.
동전에 대한 백성들의 인식도 변했다.
숙종실록(44년)·승정원일기(영조6년)에 따르면 탕약을 먹으려 하지 않는 아이도 동전을 주면 마셨고 채소·소금을 파는 상인들까지 쌀 대신에 동전을 받기 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동전을 이용한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자연스레 상업이 발달하게 됐다.
물품 거래가 아닌, 동전을 이용한 물건의 매매가 손쉬워지면서 상품유통이 활발해지고 상인계층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반대로 농민층은 분화됐다.
임진왜란 이후 사전화가 극심해지면서 대부분의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소작료와 세금을 내고 나면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해지자 이들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상인이나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리게 됐고 고리의 사채를 갚지 못해 도적이 되거나 농사를 포기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됐다.
영조대 이일장이라는 선비는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전화(錢貨)가 유통된 후 인심은 이원(利源)을 좇아 각박해지고 전화를 노리는 도적들이 도처에 횡행하다”고 말했다.

상인의 성장, 농민층의 분화는 조선의 전통적인 질서를 뒤흔들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질서부터 와해되기 시작했다.
숙종·영조대를 지나 18세기에 들어서 재화를 축적한 중인·상인들은 공명첩을 사거나 양반의 족보를 사 양반이 됐고, 권력에서 밀려나거나 빈곤해진 양반들은 반대로 농업·상업에 종사하는 일도 벌어졌다.
효종의 동전유통정책이 조선의 기초 질서인 중농주의, 사농공상을 무너뜨린 셈이다.
21세기, 새로운 결제수단의 등장
효종의 ‘십전통보’가 등장한지 300여 년 만에 당시의 동전과 같이 생소한 결제수단이 등장했다.
ICT 산업의 발달과 스마트폰의 등장과 함께 현금과 신용카드를 빠르게 대체하고 있는 모바일결제, 디지털화페 등이 그것이다.
효종이 적극적인 화폐유통 정책을 시행하면서 화폐의 유통을 수동적으로 확산시키려 했다면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한 명의 개인이 개발한 디지털화폐인 비트코인(Bitcoin), 스마트폰 제조사나 인터넷·벤처 기업이 개발한 모바일결제 시스템은 국가나 정부가 아닌, 개인이나 기업이 ‘화폐 주조’에 뛰어든 경우라 할 수 있다.

효종이 새로운 결제수단으로 전국에 보급하려 했던 동전은 기존의 현물화폐인 쌀·포목을 밀어내고 사회에 정착되는 데 30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디지털화폐, 모바일결제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발달속도와 함께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으며 빠르게 화폐·신용카드를 밀어내고 있다.
20세기 중반 신용카드가 등장했을 당시만 해도 물건을 매매하는데 화폐가 필요 없다는 점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화폐는 물론 신용카드마저 필요 없는 세상이 빠르게 다가오면서 디지털 화폐, 모바일결제에 대한 불안감과 기대감이 혼재하고 있다.
스페인의 글로벌 은행 BBVA의 프란치스코 곤잘레즈 회장은 스마트결제가 확산될 시점인 2013년 12월 파이낸셜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에서 “2~3년 후면 은행 고객의 5%만이 지점을 통해 업무를 볼 정도로 IT가 은행업을 흔들어 놓을 것이며 20년 내에 디지털 은행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곤잘레즈 회장은 올해 3월 초 스페인 바로셀로나에서 열린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2015 전시회 기조연설자로 나선 자리에서도 “디지털화를 못한다면 은행은 망할 것이다. 5년 안에 우리 은행의 직원 절반은 디지털 관련 업무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은행의 미래를 예견했다.

변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당장 국내 7대 시중은행은 ATM보유수를 큰 폭으로 줄이고 있다.
1990년 조흥은행이 국내에 처음 도입한 ATM은 인터넷에 밀려 불과 30년이 되지 않아 퇴출될 위기에 처했다.
이대로라면 ‘오프라인 은행’도 ‘온라인’에 밀려 퇴출의 길을 걸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효종의 ‘십전통보’가 동전에 대한 인식부족 등으로 시장에서 퇴출된 것과 마찬가지로 디지털화폐, 모바일결제 역시 ‘보안’이라는 위험요소를 안고 있다.
모바일결제의 경우 처음 한 차례 공인인증서와 계좌를 등록하면 추가로 정보를 입력할 필요 없이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지만 비밀번호 해킹에는 취약하다.
다양한 모바일결제 수단이 연이어 나오고 있지만 이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부정거래방지시스템(FDS) 등 보안대책이 미진한 것도 문제다.
1세대 보안회사인 안랩은 올해 초 예상되는 보안위협 트랜드의 하나로 ‘모바일 결제 및 인터넷 뱅킹에서 강력한 보안위협 등장’을 예상했다.
안랩의 예상대로 모바일 결제에 대한 해킹과 이로 인한 피해가 속출하면서 모바일 결제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게 된다면 모바일결제 역시 300여 년 전 십전통보와 같은 길을 걷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의 진보는 이 같은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기술의 진보는 모바일 결제·뱅킹 등의 안정성을 제고하는 것을 뛰어넘어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결제수단을 만들어낼 것이다.
편리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이 만들어내는 미래는 당장 내일 우리 앞에 열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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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종 이방원, 국정에 통계를 활용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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